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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찬의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by 시원한부자아빠 2023.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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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문가들의 특징과 조선의 청백리

우리나라 500년 명문가들의 특징은 목표지향적(남성적)이고 관계지향적(여성적) 성격의 합작품이다. 즉 엄마 같은 아빠를 말하며 영어로는 fatherhood(아버지의 자격. 부권)이라고 한다. 과거 청백리의 후손들에게는 관리가 될 수 있는 음직을 내렸다. 백사 이항복은 경주 이씨이자 청백리였는데, 25세 과거에 4등으로 합격했다. 권율의 부친 권철이 손녀 사윗감으로 발탁해서 19세 때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권율은 사위인 이항복 보다 2년 늦은 46세(1582년) 과거 급제했는데 이후 하급관리로 머무르다가 서애 유성룡에 의해 발탁되어 임진왜란 7년 동안 도원수로 활약했다. 청백리 선정 절차는 다음과 같다. 먼저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수장이 천거하고 임금의 재가를 얻어 의정부에서 선출했다. 명종 때부터는 염근리라는 명칭을 붙여 선발했다.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사후에 청백리로 녹선 했다. 조선시대 총 219명의 청백리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손중돈, 이원익, 김장생, 이항복, 김상헌 등이 있다. 국조인물고는 조선 태조부터 숙종까지 주요 인물을 모은 전기집인데, 총 2,000여명 중 1/10이 청백리다. 조선 건국 후 임진왜란 발발한 선조 25년(1592년)까지 162명의 청백리, 이후 300년 동안은 57명의 청백리만 배출되었다. 조선 후기 부패가 심했음을 반증한다. 청백리 중 연안 이씨가 7명, 전주 이씨, 파평 윤씨, 진주 강씨가 각 6명, 신안동 김씨, 광주 이씨, 전의 이씨, 문화 류씨, 창녕 성씨, 양천 허씨 등이 각 5명씩 배출되었다.

조선 명문가들의 역사

한음 이덕형은 백사 이항복(오성)보다 5살 연하인데, 한음 이덕형이 30대 후반에 재상에 오르는 등 먼저 앞서 나갔다. 이후 인목대비 폐위사건에 반대한 이덕형은 벼슬에서 쫓겨나 지방에서 여생을 마쳤다. 백사는 자신보다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한음 이덕형의 묘비명을 지어 주었다. 백사는 율곡의 비문, 이순신의 노량비문, 권율의 묘비명도 작성해 주었는데, 이후 인목대비 폐위반대 상소를 올려 함경도 북청 유배 후 5개월 만에 병사하였다. 백사의 후손들은 4명의 영의정, 1명의 좌의정, 내리 8대째 판서(장관급)을 배출하였다. 우당 이회영이 백사의 후손이고, 이후 백사파라는 독자 계보 만들었다. 우당 이회영의 6형제는 모두 독립운동가인데, 1910년 조선이 망한 후 6형제가 가산을 처분한 후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갔다. 당시 재산이 화폐로 40만 냥(현재가치 600억 원 정도)였는데,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6형제 중 5형제는 죽거나 실종되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우당 이회영의 차남 이규학의 아들인데, 이규학은 상해에서 일본 헌병대 고문 끝에 청각 상실하였다. 이종걸 국회의원은 우당 이회영의 손자인데, 박정희 독재에 항거한 사람이다. 안동 전주 류씨의 옛 외갓집이 의성 김씨 청계 김진 가문이다. 전주 류씨가 420여 년 동안 김진 기일에 맞춰 대구포를 들고 의성 김씨네를 방문했다. 조선시대 벼슬 얻는 방법으로는 과거 합격, 음직, 도천(그 지방의 감사가 유능인물 천거)이 있었다. 퇴계학의 계보는 학봉 김성일, 갈암 이현일,그의 아들 밀암 이재, 18세기 대산 이상정, 정재 류치명 순서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문집을 가장 많이 낸 가문 빅 5가문은 의성 김씨, 안동 김씨, 진성 이씨, 반남 박씨, 전주 류씨다. 조선후기 영남의 퇴계학파(남인)는 벼슬길이 막힌 탓에 학문에 정진하였다.

명문가의 특징

서계 박세당은 소론의 영수였는데 박세당을 비롯한 후손까지 총 4대가 임금에게 직언을 해서 고초를 겪었다. 조광조의 스승 야천 박소는 권신 김안로를 탄핵하다 반격을 당해 조정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합천 외가에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고려 목은 이색의 스승 박상충(반남선생)은 고려 친원파 이인임을 비판한 상소를 올렸다가 장형에 처했고 유배길에서 44세로 사망했는데, 이후 반남 박씨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박세당은 우암 송시열과 대립하였는데, 40세에 수락산 자락으로 은거하여 살았고, 그의 아들 박태보는 숙종의 인현왕후 폐위를 막다가 고문당하고 유배길에서 죽었다. 연암 박지원은 노론으로서 그의 5대조 박미가 선조의 사위였는데, 야천 박소와 같은 뿌리다. 야천 박소의 5명의 아들 밑에서 16명의 자손이 나왔는데 인재가 쏟아져 나왔다. 문과 급제자가 127명이 배출(조선 2위 기록) 되었다. 1위 기록은 안동 김씨 김생해 가문(청음 김상헌, 선원 김상용 배출)으로서 300년에 걸쳐 136명의 과거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3위는 약봉 서성 가문으로 105명이 배출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는 고위 관리나 학자에 대한 사후평가가 적혀 있다. 최초 김상헌의 졸기는 6,915자가 기록되었다. 그런데 율곡 이이는 처음에는 "이조 판서 이이가 졸하였다"가 전부였다가 이후 선조 수정본에서 3,444자가 기록되었다. 퇴계 이황은 최초 120자가 기록되다가 선조 수정본에서 2,526자가 기록되었다. 그러나 실학파(박세당, 정약용, 박지원)는 아예 졸기가 없다. 청음 김상헌 가문은 장동 김씨라는 새로운 본관(서울 자하문 장동에 터를 잡아서 유래함)인데, 단일 가문으로 136명의 문과 합격자(조선 1위)를 배출했다. 15명의 정승과 6명의 대제학, 3대 연이어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다. 그러나 장동 김씨는 순조 이후 철종까지 60년 동안 세도정치로 권력의 화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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