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소요유
장자라는 책에서 나오는 붕(鵬)의 정체는 지인, 신인, 성인이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동일인이자 절대 자유의 초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가득 채우려는 초인이 아니라 자기를 완전히 비우려 하는 초인이다. 장자의 라이벌은 혜자(惠子)인데, 본명은 혜시이고 명가(논리학파)에 속한다. 혜자는 장자가 곤이니 붕이니 허황된 소리를 한다면서, 장자의 말은 크기만 컸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다. 동양철학은 이성을 의도적으로 폐기시켰다. 이성 역시 감각에 비하여 '특별히 확실한 것'이 전혀 아니다. 왜냐면 이성의 작용이라는 것 역시 조작과 선택이 가능한 하나의 인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 혹은 영원한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이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면 이성은 결국 주관과 객관의 이원성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이성이라는 주관은 자기가 객관으로 한정한 대상에 대하여만 인식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을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원성 아래서 움직이는 이성의 태생적 한계다. 우주의 참된 실재는 주, 객으로 양분된 의식 상태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다.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주, 객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근원적 일심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일심상태, 이것이 바로 '이성 너머의 것'이며, 이른바 초의식(super-consciousness)인 것이다. 장자의 소요유는 삶을 수단시 하지 마라는 뜻이고, 삶 자체가 목적임을 알라는 말이다. 이 삶이라는 여행은 무슨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이 여행 자체를 즐겨라. 소(逍)는 소풍 간다는 뜻이고, 요(遙)는 멀리 간다는 뜻이며, 유(游)는 노닌다는 뜻이다. 결국 소요유는 멀리 소풍 가서 노는 이야기를 말한다.
조삼모사와 장자
조삼모사에 대하여 열자라는 책에서의 해석은 "능력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농락함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성인이 지혜를 써서 뭇 어리석은 이들을 농락하는 것도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장자가 조삼모사 우화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말은, 자아의 집착에서 해방되어 영원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라는 것이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영원의 상(相) 아래에서'라고 불렀다. 조삼모사의 참뜻은, 자아를 넘어선 이가 진인, 신인, 초인이다라는 것이다. 그가 바로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구만리 창천을 날아오르는 붕이다. 오직 그 사람만이 모든 제약을 벗어나고 모든 분별, 대립을 초월하여 절대의 세계에서 조물자와 더불어 유유히 소요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눈에는 이제 원숭이들과는 다르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차별이 사라져 전체의 영원한 상이 통일된 하나의 모습으로 장엄하게 계시되는 것이다. 장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마음을 통한 인식작용으로는 전체, 즉 도(道)를 볼 수 없다. 유가, 묵가의 시비지심을 비판한다. 즉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하려고 나서는 그자는 누구인가? 어느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태가 중대하면 할수록 남이 내린 옳고 그름의 판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장자는 맹자의 시비지심을 특히 좋아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따지면 도가 허물어진다. 선종의 3조 승찬이 신심명이라는 책에서는 지도무난, 유혐간택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지만 분별심(간택 : 시비와 거의 동일어)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 불교의 단순 명쾌한 통찰은 많은 부분 장자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자의 호접몽
비몽사몽의 꿈은 무의식의 중간층에서 발생하는 보통사람들의 통상적 꿈이다. 아주 깊은 꿈으로 평생 2~3번 꿀까 말까 한 꿈에는 중대한 계시가 들어있다. 첫 번째 꿈을 깬 것은 나비가 꿈이란 것을 알게 된 평범함인데, 이를 각이라 한다. 두 번째 꿈을 깬 것은 장주 역시 하나의 꿈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 대각이다. 나비의 꿈 중 첫째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구별, 둘째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구별을 뛰어넘는 변화, 즉 물화를 말한다. 물화(物化)란 장자가 제시하는 제물론의 최종 결론이다. 물화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넘나듦을 말한다. 장주는 장주고, 나비는 나비다. 구별이 있다. 그러나 현실 너머의 근원의 세계에서도 양자에 구별이 있을까? 우주 만물 전체는 언젠가 모두가 모두를 서로 품었던 혼연일체의 한 덩어리가 아닌가? 천지만물은 결국 한 몸이다. 물화의 세계는 아무런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궁극의 세계다. 상아(喪我) 혹은 무아(無我)의 경지다.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절대의 세계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도(道)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장자의 나비의 꿈은 비슷하다. 반야경은 전체가 600권이고, 그중 금강반야경(금강경)이 위대한 통찰로 가득하다. 금강경은 일체의 사물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고 한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수입되었을 때 중국인들의 현세주의에 부딪쳐 포교에 어려움이 많았다. 장자의 제물론이 불교의 금강경을 중국식으로 풀어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장자에 의하면, 참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양생주)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연을 항상 따르고 사물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데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