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전투, 스팍테리아 전투
마라톤 전투는 밀티아데스의 창의적 전술이 있었다. 즉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 기병을 막기 위해 중앙을 얇게 양측을 두껍게 만든 진형으로 대응했고 중장보병을 1,500미터를 달리게 해서 격돌시켰다. 페르시아 군은 6,400명이 전사했고, 그리스 군은 192명 정도만 전사했다. 필리피데스가 아테네에 승리를 전하고 죽었는데, 사실은 아테네 최고의 달리기 선수였다. 필리피데스는 마라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스파르타에 원병요청을 하였고 225킬로미터를 2일 만에 주파했어도 죽지 않았다. 아테네 중장보병이 마라톤 전투 후 페르시아 수군의 아테네 상륙을 막기 위해 오전 10시에 마라톤을 출발해서 6~7시간 강행군해서 아테네에 도착했다. 스팍테리아 전투는 그리스와 스파르타가 스팍테리아 섬에서 한 전투다. 그리스의 하급신분출신인 경보병과 궁수가 스파르타의 귀족출신 중무장보병을 격파한 전투다. 그리스의 데모스테네스가 승리했다. 이는 그리스인들의 암묵적 금기를 깬 것인데, 스파르타인들은 이 전투 자체가 불법이라서 전부 항복했다. 그때까지 그리스 전쟁에서는 전투 효율성 보다 시민층의 특권이 먼저였다. 하층 경보병이 귀족 중장보병을 유린하거나 도망치는 중장보병을 추격해 잡는 방식은 흉악한 발상이라 여겼다. 이후에도 그리스는 데모스테네스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데모스테네스 조차 이런 전투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진포해전, 나폴레옹전쟁
고려시대 진포해전은 1380년 최무선과 나세 장군이 진포에 상륙한 왜선 300척을 불과 100척의 화기로 불태운 전투다. 화약 제조법을 배운 사람은 최무선이 아닌 최무선의 노비였다. 최무선은 화약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화약 제조에 독소인 비소를 사용했었다. 화약의 기원은 연단술에서 비롯되었다. 불로장생약을 개발하기 위해 황과 초석을 사용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3~4세기에 발견한 후 10세기경 송나라 때 비로소 무기로 개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재와 먼지가 군현에 바치는 중요한 공물 중 하나였다. 재와 먼지는 화약제조에 필요한 염초의 원료다. 최무선은 젊어서 무관이 되었고 중국어를 잘했다. 중국 상인을 수소문해서 화약제조법을 아는 이원이라는 인물을 찾아내고 극진히 대접해서 화약 제조법을 알아냈다. 최무선은 당시 도평의사사에 화약제조법 알아냈다고 했으나 아무도 안 믿어줘서 몇 년을 허비했다. 조선은 무사계층을 문관과 선비로 전환시켰는데, 이는 사회불안세력인 무사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조선의 이러한 시도는 화기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1790년 현상공모를 했는데, 바로 음식물을 장기간 보관하는 방법을 발견한 자에게 1만 2,000 프랑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1800년 니콜라 아페르가 15년의 연구결과 병조림을 발명했으나 쉽게 깨져 실용화가 되지 못했다. 1814년에 러시아군이 프랑스의 아페르 공장을 불태워 버렸다. 영국에서 통조림을 발명한 후 1813년 세계 최초 통조림 공장을 설립했다. 프랑스군은 기동력을 위해 텐트를 소유하지 않고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했으며 모닥불을 피고 나뭇잎을 덮고 잠을 잤다. 냄비는 필수품이었고, 식량은 모두 딱딱한 빵, 생쌀 등이어서 모두 수프로 만들어 먹어야 했다. 일본군은 통조림을 극도로 혐오했는데, 인팔작전에서 칭기즈칸처럼 소떼를 몰고 가다가 대부분이 굶어 죽었다.
남북전쟁, 콘스탄티노플 전투
나폴레옹이 1821년 사망한 이후 50년 사이에 강선이 발명되어 총의 살상력과 사거리가 5배 이상 증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 총과 대포에 의한 살상률은 10~20%에 불과했다. 옛날처럼 열과 오를 맞춰 진군하는 방식으로 남북전쟁이 진행되었으나, 이는 대규모 죽음을 야기했다. 왜 산개전술로 바꾸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바꿀 수 없는 문화적 요인이 존재했다. 남북전쟁 후 발생한 보불전쟁에서 병사를 산개하여 전투했는데, 당시 병사들이 적진으로 돌격을 하지 않았다. 밀집 대형에서는 명령을 잘 듣지만 산개하자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이다. 군대의 구조, 전쟁의 목적, 사회운영방식이 변해야 했다. 또한 삶과 죽음을 공유하는 끈끈한 전우애 등이 존재해야 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22.5킬로미터의 성벽을 수비하는 수비대는 7,000여 명에 불과했고 대부분이 용병이었다. 주스티아노가 포탄에 중상을 입고 성문을 열어서 항구에 있는 제노바 함선으로 후송을 부탁하자,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고, 이후 주스티아노가 빠져나가자 제노바 병사가 동요했다. 하필 오스만 군이 수비대 실수로 잠기지 않은 성문에 들어와 성벽에 오스만 제국의 깃발을 세웠다. 오스만 군은 수비대에 쫓겨 성벽을 타고 도주했고, 제노바 병사들도 도망쳤다. 오스만 군은 후퇴 일보 직전에 이를 발견하고 해자를 건너 성안으로 돌입했다. 동로마제국 황제는 두 명의 기사와 함께 오스만 군에 돌격했으나 이후 시체도 찾지 못했다. 나태해진 정신을 가진 콘스탄티노플은 당시 10만 명 인구였으나 포위 전 가담 병사는 3,000명뿐이었고, 용병 4,000명 포함하여 총 7,000명으로 수비했다. 시민들은 기도만 하고 수비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더구나 교파 간 분쟁으로 성 소피아 성당에서 전체 교파가 화합해 예배한 것은 최후공세 감행되기 전 날인 27일 딱 하루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