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의 등장과 임진왜란 전의 상황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론은 율곡의 제자가 쓴 비문 '율곡비문'과 역시 율곡의 제자가 편찬한 '율곡연보'에만 있는 내용이다. 즉 율곡 사후에 언급된 내용으로 실제로 율곡이 생전에 주장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자강파(류성룡, 이순신, 의병)와 의명파(선조, 대다수 신하)로 갈린 상황이었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다. 류성룡은 종 6품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당시 나이 44세)에서 정 3품 당상관 전라좌수사로 천거를 했는데, 당시는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의 일이다. 이는 무려 품계를 7단계나 뛰어넘어 발탁한 것이다. 당시 권율은 육군으로 기용되었다. 징비록의 뜻은 미리 징계하여 후손에게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것이다. 시경의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다. 징비록의 요체는 '모든 것은 내 탓이고, 적은 내 안에 있다'라는 것이다. 대동법은 물품공물은 모두 쌀로 대납한 것으로 선진화된 조세일원화 정책이었다. 대동법 시행 전에는 노비신공비(노비가 직접 나가 몸으로 부역하는 대신 쌀을 바치는 것), 조예번가미(관가 노비들이 번을 서는 대신 바치는 쌀), 병사자원납미(변경을 지키는 병역, 즉 방수역을 쌀을 바쳐 면제받는 것)를 납부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조선시대 노비수가 전체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둔전은 관청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말한다. 군졸, 서리, 관노비, 평민에게 간지를 개척, 경작하게 한 후 수확물로 군량과 경비에 사용했다. 당나라 유인궤가 남원에 둔전을 설치한 것이 시초였다. 1667년 현종 8년 1마지기(200평) 당 쌀 1석이 산출되었다. 2만 석은 5천 명 군사의 6개월 군량에 해당한다. 류성룡의 군량 조달 방법은 자발적 수거였다. 즉 부유한 중인들로부터 모속(민간이 자원해서 곡식을 바치는 것), 공명첩(7년 동안 류성룡이 올린 계사에 의거하면 공명첩 전체 요청 건수 1,500장 이하), 무속(무역으로 곡식 사들임. 소금무역. 은과 베로 명의 곡식을 사들임)을 사용하여 군량을 조달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상황
1593년 3월말 왜병의 점령지역은 한양, 영남해안지역, 그리고 이를 잇는 한가닥 길 뿐이었다. 명나라 군대는 1일 3되를 배급받았고, 남은 곡식을 매매했는데, 조선 군사는 1일 1되 7홉 배급받아 가족들과 나눠먹었는데 굶주림에 시달렸다. 류성룡 의 말대로 천찬, 즉 하늘의 도움을 받아 왜란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조선 군대는 상부가 많고 하부 군졸이 없는 역피라미드 형태였다. 순변사의 군대, 방어사의 군대, 순찰사의 군대, 조방장의 군대 등등 따로따로 군대가 조직되었다. 명령 또한 여러 군데에서 하달되었고, 명단에 존재하나 실제 존재하지 않은 군사가 다수였다. 속오군은 류성룡에 의해 새로 추진된 군사제도로서, 영(營)은 사대대, 초중대, 기소대, 대분대로 편제되어 1영은 모두 합쳐 2천500명의 군사로 구성되었다. 무관은 녹봉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병졸로부터 착취를 하여 생활했다. 율곡의 만언봉사, 류성룡의 상소문이 모두 이와 같은 실상을 고하고 있다. 당시 베 한 필은 36미터였다. 평민이 방수역(군역)에 1번 나가면 베 30~40필이 필요했는데 이는 1,000미터에서 1,400미터의 베에 해당했다. 녹봉 없는 장수자리가 인기였는데, 이는 부패한 국가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장수가 되어 병졸을 착취하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채수(債帥)는 장수자리를 사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부패행위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잔존했다. 명나라 군대가 와서 보니 조선군은 병기가 없고 도망을 잘 쳤다고 했다. 조선군은 농기구, 몽둥이, 죽창 든 병사가 상당했는데, 이는 조정에서 병기를 사줄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활은 조총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사용하기 불편했으며, 모두 수제작으로 살상률도 낮았다. 활쏘기는 오랫동안 숙련이 되어야 효과가 있었다. 1594년 류성룡 '진시무차' 상소문을 보면, 장부상 상번 명단에 올라있는 군사는 4만 명이었으나, 상번하는 군사는 8,000명이었다. 평상시 조선군은 상번군 8,000명뿐이었다. 보조군(보, 봉족)은 군포를 납부해서 군역 면제받은 사람들로서 모두 12만 명이었는데, 이들은 실제 군생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류성룡의 노력과 활약
1595년 류성룡의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오래 견뎌내는 것이 없습니다. 짧으면 한 두 달이고, 길어봐야 한 해를 넘기지 못해 중도에서 폐지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의지가 굳게 서 있지 못하고 계획이 먼저 정해져 있지 않아, 이리저리 옮겨서 일이 귀착할 곳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류성룡의 막부에는 문인이 전쟁을 지휘하였다. 막부는 4도(경기, 황해, 평안, 함경)에만 한정된 오로지 군무만 전담하는 기구였다. 임진왜란 참전 왜군은 총 14만 명 정도였고,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는 4만 5,000명이었다. 류성룡의 기무 10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척후다. 이일과 신립은 모두 왜군이 임박했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무시하고 보고한 자들을 참수했다. 반면 왜군은 그 지역정보를 주는 이에게 소도 줄 정도로 포상을 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너도나도 왜군에 첩보를 제공했다. 둘째장단이다. 적군의 장점과 아군의 단점을 비교하는 것이다. 조선군은 백병전에 불리하니 산성에서 포로 공격하는 것이 장점이었다. 셋째 속오다. 대오를 묶는다는 뜻으로, 병사 5인을 1오로 조직하는 것이다. 다섯째 명령엄수다. 후퇴한 병사를 죽이는 장수인 참퇴장이 존재했다. 그런데 참퇴장이 오히려 제일 먼저 도망가는 경우가 있었다. 다섯째 중호다. 성에 겹해자를 설치하는 것이다. 여섯째 설책이다. 군영의 보루가 되는 영책을 세우는 것이다. 일곱째 수탄이다. 얕은 여울을 방어하는 방법으로 마름쇠 사용이 으뜸이었다. 여덟째 수성이다. 성을 수비하고 옹성을 설치하는 것이다. 아홉째 질사다. 화살을 번갈아 쏘는 것이다. 열째 통론형세다. 형세를 총체적으로 통괄해서 논하는 것이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는데, 류성룡이 훈련도감 책임자인 도제조를 맡았다. 이후 훈련도감은 1881년 별기군으로 바꿀 때까지 300년간 존속했다. 류성룡의 훈련도감은 정병 1만 명 제도를 추진했다. 병사 1인당 배급량이 1일 1되 2홉 기준이었다. 1만 명의 1년치 군량을 4만 4천석으로 잡았고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하면 1일 3되로 잡았다. 1년 동안의 1만명 식량은 10만 8천 석에 달했다. 류성룡은 1566년부터 1598년까지 32년 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한 번도 탄핵받거나 유배되지 않았다. 파직한 후 이듬해 2월 고향 하회로 귀향한 후 다시는 한양으로 가지 않았다. 의인왕후 국상 때 동대문 밖 길가에서 곡을 하고 성안으로 안 들어가고 그날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라에서 보낸 화사의 초상화까지 거절했다. 이후 여진족의 기마병에 대한 대책을 세운 군문등록, 근폭집을 만들어 후일의 자강을 도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