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소비를 유도하는 이유
파르헤지아(parrhesia)는 진실을 말하기라는 뜻이다. 미셀 푸코는 철학이 파르헤지아와 관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실존의 형태를 선택하게 된다. 직장상사에게 "쓰레기 같은 놈아"라고 말하는 순간 내 삶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욕망(desire)은 한도가 없다. 반면 욕구(need)는 유기체의 자기 보존을 위한 정상적 기제이다. 뇌가 낙관적인 이유는 어차피 죽을 텐데 뭐 하러 힘들게 사냐는 부작용에 대한 대비책일 뿐이다. 포르노 보다 더 포르노 같은 멜로가 있다. 한국드라마 남자주인공이 재벌 2세에서 외계인으로까지 발전했다. 절대동안은 필수고, 재산은 썩어나도록 많은데 고생한 흔적이 없다. 시월드도 없다. 술도 잘 안 하고 친구도 없다. 몸짱이다. 모든 걸 구비한 주인공은 포르노 보다 더 심한 멜로물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쓸만한 남자 자체가 없다. 자본주의는 계속 소비를 유도해야 한다. 여성의 성형수술은 자신감을 가지기 위함이다. 유행은 표면적 이유일 뿐이다. 그 밑에 깔린 것은 불안감, 강박증이다. 왜 예뻐져야 하는지, 예뻐지면 어떤 인생이 기다리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하지 않는다. 그냥 습관적으로 한다. 남성들은 '한방'을 추구한다. 이는 인정욕망, 지배욕구의 산물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는 100년 전까지(자본주의 도입 전까지) 부귀영화를 덧없는 것으로 여겼다.
악의 뿌리에 대하여
모든 철학은 의학이다. 동양철학, 그리스 철학도 모두 몸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했다. 지혜가 곧 몸의 기질을 바꾸고 몸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증오가 정치의 본질이다라는 말은 에릭 호퍼와 같은 주장이다. 연고주의 타파는 사실상 어렵다. 차라리 공익적 연고주의를 인정하자. 인정욕구의 문화를 다변화하자. 내가 기준에 못 미치면 친구도 안 만난다. 세상을 지키는 사람들은 '악에 맞서 더 악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수백 배 더 큰 사랑과 용기로 가장 단순한 선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악 따위는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는 최선의 선의를 실천하는 용기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 리시스트라테(lysistrate)에서는 여성들의 리더 리시스트라테가 전쟁반대를 위한 여성 섹스 보이콧을 주장하여 승리한 내용을 담았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권력과 재력일 지도 모르나, 세상을 지키는 힘은 무의미해 보이는 청소 같은 노동을 끝없이 감당하는 시시포스 같은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삶의 어원은 '시름'이다. 데카르트는 프랑스 수도원에서 살다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마초 합법)으로 이주했다. 이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게 된 시기다. 칼 구스타프 융은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에서 현대 문명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악으로부터의 도피'를 꼽았다. 우리는 악의 뿌리를 탐구해야 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부처의 마지막 말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150만 명이 죽었는데, 2차 대전 중 전체 6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심수관이 일본에서 자기 이름을 고수한 이유는 애국심이 아니라 그 마을 번주가 일본식 이름을 못 쓰게 해서다. 이후 명치유신 이후에는 심수관이 브랜드화되어서 바꿀 이유가 없어서 더욱 바꾸지 않았다. 서포 김만중은 상위 0.1% 사람이었다. 증조부가 김장생이고, 부친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사람이다. 부친이 강화도 성문에서 화약에 불을 붙여 자결할 때 모친이 피난 가는 배 안에서 김만중을 낳아서 초명을 선생(船生)이라고 하였다. 외가는 공주 집안이고, 모친이 인조 임금의 외사촌이었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오는 최후의 인간은 현재 상태에서 어떤 불만족도 느끼지 못하고, 현재의 상태를 극복하려는 의지도 없는 사람이다. 최후의 인간의 관심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그 어떤 것을 향할 뿐이다. 호모 사케르는 희생당할 수는 없지만, 살해당할 수는 있는 존재다. 신적인 법정의 영역에 들어 설 수도 없고, 살해당한다 해도 인간의 법으로 살인자를 처벌할 수 없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책임능력이다. 책임(responsibility)과 응답(response)의 상관관계는 책임의 뜻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나에게 달려 있지 않는 것(부모, 국적, 인종 등)에 신경 쓰지 말고 나에게 달려 있는 것에 주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