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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망각과 자유

by 시원한부자아빠 2023.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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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에 대한 장자와 혜능의 입장

장자는 도행지이성이라고 하면서, 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데서 완성된다고 했다. 길은 미리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장자가 말한 길의 끄트머리에 타자('다른 사람'을 뜻한다)를 발견한다. 우리는 왜 타자에게로 건너가야 하냐면, 우리는 타자와의 사랑과 연대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다. 장자가 망각을 강조한 이유는, 오직 망각만이 우리 삶을 좀먹는 기억들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망각은 하나의 통과의례일 뿐이다. 인문학의 최종 목적은 사랑과 연대를 가능하도록 하는 새로운 기억들을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망각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타자로 비약하는 데 장애가 되는 일체의 무거움과 우울함을 비운다는 것이 허(虛)다. 모두 비운 후 뛰어 봐도 장밋빛 미래가 저절로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절벽에 떨어지거나 하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 혜능의 육조단경에서는, "만약 자신의 본마음을 깨달으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일단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반야는 지혜를 뜻하고, 삼매란 선정에 들었을 때의 경지를 말한다)이다. 반야삼매를 깨달으면 이것이 곧 무념이다. 어떤 것을 무념이라 하는가? 무념이라는 불법은 일체의 모든 대상을 보면서도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일체의 모든 장소를 두루 다니면서도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항상 자성을 청정히 하여 여섯 가지 도적을 여섯 가지 문에서 쫓아내고 육진(다섯 종류의 감각대상과 한 가지의 사유대상)의 경계 속에 있으면서도 이것과 떨어지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으며 가고 오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 반야삼매이며, 자유자재한 해탈이니 이것을 무념의 실천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면 생각을 끊어야 한다고 하지 마라. 이것은 곧 불법에 속박된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편견이다."라고 말한다.

칸트 등 철학자들의 망각에 대한 입장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무념이 의식-운동을 무력화시키는 운동이라면, 실천(行)은 망각이라는 능동적 힘을 통해 확보된 '감각-운동'의 활성화인 셈입니다. 그래서 혜능은 '모든 것들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면 생각을 끊어야 한다고 하지 마라'라고 충고했다. 무념의 실천이란 '세계 속으로의 초월'이지 '세계 밖으로의 초월'이 아니기 때문이다.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의 '숭고(Erhaben, the sublime)'에 대한 느낌은 자신을 압도할 정도로 거대한 폭포 앞에서 전율할 경우, 고산준령 위에서 산을 허물어뜨리듯이 강타하는 폭풍우를 만났을 경우 등을 말한다. 결국 숭고는 우리가 자신을 압도하는 타자적 힘과 마주쳤을 때, 일체의 조화라는 이념이 무기력해지는 지점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느낌이다. 아름다움의 무관심은 타자를 관조하는 무관심(관조의 미학)을 말한다. 숭고의 무관심은 타자와 마주쳤을 때 발생하는 무관심(마주침의 미학)을 말한다. 타자와 마주치지 않았는데도 발생한 소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소음일 뿐. 우리는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을 제거해야 한다. 진정한 소리는 타자와 마주치면서 발생해야 한다. 소통의 소(疏)는 트다는 뜻이고, 통은 연결되다는 뜻이다. 소통이란 개념은 철학적 범주로 쓰인 적이 별로 없고, 치수사업이나 동양의학 관련해서 많이 사용되었다. 마음을 활짝 터서 타자와 연결되어야 한다. 칸트의 미학은 아름다움의 관찰자라는 입장이고, 장자의 미학은 그것을 넘어서 예술적 표현의 창조자라는 입장이다. A가 -A와 같다는 뜻은, A라는 규정과 -A라는 규정이 겹쳐지는 공간이자, 도추(道樞. 도의 지도리. 지도리란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해주는 문의 회전축을 뜻함)의 공간을 말한다. 득환중(得換中)은 원환의 중심을 얻은 것을 말한다. 만약 우리가 정확하게 물건을 돌아가는 물레중심에 놓으면 그것은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된다. 겉으로 보기에 중심부는 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나 단순히 비워있는 공간이 아니다. 샤르트르의 실존 개념은, 나는 항상 내가 아닌 자로 존재하고, 나는 항상 내가 존재하는 자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장자의 자유의식에 대하여

장자의 송나라 모자 상인 이야기에서 어떤 상인은 월나라가 모두 단발머리를 하는 줄 모르고 송나라 생각만 하고 모자를 팔러 가서 망했다는 우화가 나온다. 즉 장자는 우리가 제한적 시선이 아닌 포괄적 시선, 유한한 시선이 아닌 신적 시선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인은 옳고 그름(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대립을 조화시키고, 천균天鈞에 편안해한다. 이를 일러 '양행'이라 한다. 양행(兩行)은 타자성의 테마와 판단중지의 테마를 뜻한다. 대표적인 우화가 조삼모사다. 장자는 이 두 가지 테마의 분리 불가능성을 양행이라고 한다. 타자성의 테마는 송나라 상인이 송나라와 전혀 다른 타자, 월나라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판단중지의 테마는 송나라 사람이 월나라에 들어가서 생겼던, 상인이면서 동시에 상인이 아닌 자신의 동일성이 와해되는 듯한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경험 혹은 실존의 상태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판단을 중지하고,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호접몽의 내용은 회의주의가 아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라는 구절에서 회의주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장자가 호접몽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은 나비가 되어야 할 때 나비가 되고, 장주가 되어야 할 때 장주가 될 수 있는 생성의 긍정이지, 나비가 되어도 좋고 장주가 되어도 좋다는 식의 경박한 자유의식이 아니다. 장자의 물화(物化)는 매 순간 타자와 함께 변형함을 의미하고, 타자와의 소통에 의한 주체의 변형을 나타낸다. 나비와 장자 사이에 구분이 없는 판단중지의 천균상태와 나비와 장자 사이에 반드시 구분이 있어야만 하는 타자 의존적인 인시(因是) 상태를 양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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